신앙역사 간증

백홍준(우리나라 최조의 기독교 신자, 이응찬(성경 번역가),

헤븐드림 2017. 7. 21. 23:48

백홍준 (1848. ?~1893. ?) 장로
대한민국 최초의 기독교 신자, 최초의 장로교 전도사 및 장로. 최초 순교자, 호는 북산, 평북 의주 출생.
 
1848년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으며, 1876년 중국만주에서 로쓰 목사를 만나 한국인 최초로 세례교인이 되었다. 1883년 의주교회를 개척했으며,1887년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이단 사설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2년 간의 옥중생활로 1893년 병사하였다.

1. 세례받고 성서간행에 힘쓰다.
 
백홍준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1874년 이른 봄에 만주로 건너갔다가 중국 주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목사를 만나게 되어 3년 동안 우장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던 그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신앙을 고백하고, 1876년 이웅찬,이성하,김진기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자가 된 백홍준은 세 동료와 함께 로스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1882년에는 최초의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심양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뒤를 이어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 마가복음, 마태복음을 간행하였다. 1885년에는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에베소서가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표제가 붙은 신약성서를 발간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완역된 성경으로서 흔히 [로스번역](Ross Version)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는 1882년 간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가지고 서간도의 한인촌을 찾아가 전도에 종사하였다.그래 가을에 그는 다시 로스목사와 휑스터(James Webster)목사를 동반하여 서간도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2. 전도인의 사명을 띠고 성경을 국내에 반입


1883년 백홍준은 로스 목사로부터 전도인(勸書人이라고도 함) 의 직임을 받아 가지고 간행된 복음서를 등에 지고 국내에 잠입하여 동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띠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고향인 의주 압록강 대안에까지 와서 살펴보니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밤사이에 성경을 한장씩 풀어가지고 낱장으로 하염아고, 이 종이를 말아서 노끈으로 만들었다.다음날 아침에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나머지 성경을 그속에 감추고 노끈으로 묶어 마치 고지를 사오는 것처럼 꾸며가지고 국경을 넘어섰다.


3. 의주교회를 개척,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 활동.

집에 들어오는 그는 [노끈 성경]을 정성껏 풀어 다시 책으로 만들었으며 이 귀중한 성경을 가지고 의주를 비롯하여 위원,강계,구성,삭주 등지 일대를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반년이 못되어 10여명의 신자가 그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게 되었다. 이 의주교회는 정식으로 된 조직교회는 아니었지만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국내 최초의 집회였으며 일종의 기도처였다.

1890년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개최한 최초의 신학반에서 공부하였고 그후에 서상륜,최명오 등과 함께 한국교회에서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평북일대의 교회 개척의 중임을 맡았다. 그가 순교한 1893년부터는 그의 사위되는 김관근조사(후에 목사가 되었음)가 위의 책임과 의주교회 시무를 인계받았다.

 

4. 서상륜과 더불어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1887년 백홍준 전도사는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서울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9월 27일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놓고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로서 백홍준과 서상륜의 두 사람을 장
로로 세우고 새문안교회를 발족하였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던 한국교회는 전국이 하나의 교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복음전파를 위하여 뛰어난 업적을 쌓아올린 두 인물이 장로로 추대받아 장립된 것이다.

백홍준 장로는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에게 압록강 하류 의주에 와서 여러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드디어 언더우드 목사는 1889년 결혼을 구실로 하여 의주까지의 신혼 여행의 허락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의주로 온 언더우드 목사는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100여명 신자가 있는것을 보고 너무나 감격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세례문답을 거친 후 33명을 선발하여 배에 태우고 압록강 한가운데로 나아가 압록강 물을 떠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한국인 프로테스탄트로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다.

 


백홍준 전도사는 한국인 최초 7명 목사 중의 한 사람인 한석진에게도 전도하여 1891년 마펫선교사가 의주에 들렸을 때 김정호,김석례 등과 함께 세례를 받오록 인도하였다.

백홍준 장로는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중국 심양을 왕래하여 로스 목사와 연략을 취하였다. 1890년에는 로스 목사가 의주로 나와서 그의 집에 한달 이상을 유하면서 신도들의 신앙 지도에 힘쓰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다음해에는 마펫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가 전국순회여행을 하면서 의주에 들러 백홍준의 안내로 의주와 강계일대에서 전도하고 돌아갔다. 다음해에는 마펫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가 전국순회여행을 하면서 의주에 들러 백홍준의 안내로 의주와 강계 일대에서 전도하고 돌아갔다. 

이처럼 백홍준 장로를 길잡이로 하여 여러 양인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서 관가에서는 백홍준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고 적개심을 품고 주목을 하였다.

1892년 그는 드디어 평안감사 민병석의 지시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백홍준 장로는 목에 칼(형구의 일종)을 쓰고 2년동안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쇄약해져 1893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인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응찬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젼서>의 번역에 매달려 절반 이상 번역과 수정을 한 후인 1883년 9월 콜레라로 소천하였다. 예전에 술과 아편을 즐기던 그가 성경 번역을 몰입하여, 그 복음을 동족에게 전해주려고 애쓰다가 이국 땅인 만주 봉천에서 순교하였다.

1876년 봄,로스는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한글선생을 고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스는 1877년 이응찬과 함께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한 기초 한글교재(Corean Primer)를 간행하였고,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당시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응찬이 로스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안 어떤 한국 사람이 이응찬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인 1879년 봄,이응찬은 다시 만주로 왔다.
 
당시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하던 번역사업은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을 한글교사로 삼고,성경을 계속 번역하도록 했다. 이때 번역한 것이 로마서 히브리서였다. 이응찬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편쟁이로 의심받았고,식사 때에는 중국 화주(火酒)를 곁들이는 습관이 있어서 그가 출석하던 중국교회신자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하였다. 이응찬의 세례는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응찬은 짬을 내어서 고향을 방문하였고,매킨타이어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응찬은 고향에 가서 성경을 깊이 연구한 다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1879년 여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인으로서는 세 번째 세례였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응찬은 로스와 더불어서 성경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긴 세월을 통해서 로스와 이응찬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성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완간되었다. 이응찬은 이 최초 한글성서의 반절 이상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성경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1883년 9월 이국 땅 봉천에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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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선교사

















서상륜(1848~1925)은 1901년9월 9일자 ‘그리스도신문’에 자신의 기독교 개종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십칠년 전에 대청국 봉천성 우장당방 영구라 하는 항구의 여간 사소한 장사를 갔다가 뜻밖에 신병을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당하였나이다. 그때에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어 전도하시는 대영국 목사 마근태(매킨타이어)씨에게 감동하사 나를 객점에서 자기 집으로 옮기고 영국의사를 청하여 매일 이삼차씩 진병하며 복약하매 거의 두 주일 동안에 회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알지 못하였으나,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때부터 나를 부르셨나이다. 그때 처음 마근태 목사에게 그리스도 예수씨 복음을 전해 듣고 성경책도 얻어 보았나이다.”
평북 의주 출신 서상륜은 한만(韓滿)국경을 오가며 홍삼무역을 하던 장사꾼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 주재하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한국선교를 꿈꾸며 한국인 동역자를 구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반포함으로써 한국선교의 결실을 보는 것이었다. 매킨타이어의 도움으로 장티푸스를 치료한 서상륜은 로스 성서번역팀에 합류했다. 당시 번역팀에는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 의주 동향의 홍삼장수들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학식이 높았던 서상륜의 가담으로 한글성서번역은 활력을 띠고 마침내 1882년 누가복음서가 한글로 간행되었다. 이들 번역자들은 스스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개종자가 되고 또한 권서(勸書)전도자가 되어 조국 전도길에 올랐다. 서상륜은 1882년 10월 조국에 잠입해 기독교 금교(禁敎)하의 고난을 극복하며, 이른바 ‘서북 벨트’의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의주, 평양을 거쳐 연고가 있던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에서는 예배모임을 결성, 마침내 한국인 스스로의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로스역(譯) 성서를 지니고 압록강 국경검문소를 넘다가 구금된 일, 제물포 세관에 압류된 성서를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되찾은 일 등 다 헤아리기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서상륜은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갔고, 이는 곧바로 내한한 미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에 의해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는 바로 서상륜이 전도한 신도 대다수로 구성됐다. 

서상륜은 이른바 한국프로테스탄트 ‘북방선교루트’(스코틀랜드장로교계)의 대표자로서, ‘남방선교루트’(미국개신교선교부)와의 연합을 이룩한 주축이었다. 교직도 갖지 않았던 그는 1925년 12월 16일 별세하였고, 그 아우가 최초의 한국인 장로교 목사 중 한 명인 서경조이며, 독립운동가 서병호, 서원석(대한성서공회), 서경석(목사) 등이 모두 그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