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산책

서정주, 「상리과원(上里果園)」(낭송 주하림)

헤븐드림 2013. 6. 2. 03:43





서정주, 「상리과원(上里果園)」

꽃밭은 그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상류(洛東江上流)와도같은 융융(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골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같은 굉장히 질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둥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네온 배나무의 어떤것들은 머리나 가슴팩이뿐만이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ㅅ굼치에까지도 이뿐 꽃숭어리들을 달었다. 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數十萬)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구치고 마짓굿 올리는 소리를허고,그래도 모자라는놈은 더러 그속에 묻혀 자기도하는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할려면 어떻게했으면 좋겠는가. 무쳐서 누어있는 못물과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어서, 때로 가냘푸게도 떨어져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우에 받어라도 볼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조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黃昏)의 어둠속에 이것들이 자자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것인가.

하여간 이 한나도 서러울것이 없는 것들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微物)하나도 없는곳에서, 우리는 서뿔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서름같은 걸 가르치지말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것, 비비새의 어느것, 벌 나비의 어느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것에 대체 우리가 행용 나즉히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것이 깃들이어 있단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귀소(完全歸巢)가 끝난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山)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때가 되거던,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곳의 별을 가르쳐 뵈일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鍾)소리를 들릴일이다.

● 시_ 서정주 –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같은 해 김동리, 이용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동인지 활동을 했다. 1941년 발표한 첫 시집 『화사집』 이후,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미당 서정주 전집』(전2권), 『늙은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2000년 85세 나이에 생을 마쳤다.

● 낭송_ 주하림 – 시인. 1986년 전북 군산 출생.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이 있다.
● 출전_ 『미당시전집 1』(민음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걸어갔습니다. 풀빛이 짙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물이 풀린 강변입니다. 발걸음이 초록입니다. 초록 걸음을 걸어봐야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듯합니다. 다른 것 다 제하고 오직 삶 하나만 느껴지는 걸음입니다. 유실수들이 꽃을 맺었고 맺은 것을 또 터트려 피워내고들 있습니다. 과수원의 나무들, 오직 꽃 피워내는 것 하나만으로 벅찹니다. 찬란합니다.

겨울의 날카로웠던 하늘은 대지의 몽상에 그만 젖어버립니다. 벌과 나비의 축제, 조카딸년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향기와 더불어 저물녘이 다 되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화창합니다. 설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설움 같은 게 어디 우리 인생에 있단 말입니까.

이 육자배기 가락과도 같은 이 대지의 가락을 알기만 한다면 그런 것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에 숨어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