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역사 간증

마르틴 루터 1. (종교개혁의 발자취)

헤븐드림 2012. 9. 16. 00:14

1517년 늦가을. 독일 엘베 강가의 조용한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의 아침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우유배달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사이 검고 긴 사제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어디론가 분주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의 손에는 둘둘 말린 큰 종이뭉치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투지와 긴장감이 배어났다. 젊은이가 도착한 곳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교회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채에 부속된 ‘성채교회’(Castle Church)였다. 그러나 그곳에 대학이 설립되면서부터 ‘대학교회’로 사용된 것이다. 

육중한 대학교회 문앞에 멈춰선 젊은 사제는 가지고 온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종이가 펼쳐지자 며칠 밤 관솔불 밑에서 밤이 늦도록 한 자씩 써내려간 촘촘한 글씨들이 드러났다. 그는 펼쳐진 큰 종이를 대학교회의 문에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여놓았다. 성문 입구에 위치한 이 대학교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이었고 교회 출입문은 대학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알리는 게시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부 독일의 매서운 추위가 밀어닥치기 직전 10월의 마지막 날 대학교회 정문에 장문의 게시문을 붙여놓은 젊은이는 그곳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던 34세의 소장학자 마르틴 루터 교수였다. 그는 24세에 가톨릭교회 신부로 서품 받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당시 신설대학이었던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젊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대학 사회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정성스럽게 기록하여 대학교회의 문에 붙여놓은 게시물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 신부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밝히려는 소망으로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성명서에 관해서 대학 안에서 토론하고자 합니다. 토론 장소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문서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당시의 현안에 대해서 대학내에서 학문적으로 공개 토론하자는 초청의 글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제기한 공개 토론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황의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던 ‘면죄부’에 관한 것이었다. 돈을 주고 사는 면죄부가 정말 인간의 죄와 이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면제해줄 수 있는가,또한 가톨릭교회 교황은 참으로 면죄권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95개 조항에 이르는 장문을 통해서 그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95개 조항’에 나타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제1조,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의 삶은 항상

참회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조,참회란 교회에서 성직자가 집전하는 ‘참회의 종교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21조,교황의 이름으로 된 면죄부를 사면 죄의 형벌을 면죄 받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제27조,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찰랑 소리 내며 떨어질 때 ‘연옥’에 있던 영혼이 연옥 밖으로 뛰어나온다고 설교하는 것은 허황된 거짓말이다.
제28조,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찰랑 소리내며 떨어질 때 (교회의) 돈에 대한 탐욕만 늘어난다.
 

(27?28조는 당시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즐겨쓰던 말을 루터가 인용하면서 반박한 것이다.)
 

제45조,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86조,엄청난 부를 소유한 교황은 (면죄부를 팔아) 가난한 크리스천의 돈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해야할 것이 아닌가.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95조,크리스천은 많은 고난을 거쳐 천국에 가는 것이지 (면죄부를 샀다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장장 95개 항목에 이르는 긴 글을 통해서 교황의 면죄권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 단호히 ‘아니오’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가 대학 안에서 공개 토론을 위해서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 95개 조항을 대학교회 문에 게시했을 때 그것이 몰고올 해일과도 같은 역사의 새 물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교회개혁이라는 역사의 대변혁에서 자신이 주역을 감당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95개 조항’은 당시 가톨릭교회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각변동의 진원이 되었고 1517년 10월31일은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