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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서정(秋日抒情) 1. / 김광균
가을풀 길길이 누운 언덕 위에
소월(素月)은 무명옷을 입고 서 있다
남시(南市)의 십년(十年)을 떨치고 일어나
흰구름 오가는 망망한 남쪽 바라다보며
원망이 서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꿈을 깨고 일어나 창문을 여니
창 밖에는 가을이 와 있었다.
돌담 위에 서린 안개 속에
가지마다 휘어진 감들이 보인다
팔, 구월에 달려 있던 청시(靑枾)들
알알이 등불을 켜고
감나무는 절반이 가을 하늘에 잠기어 있다
아 ― 어느 보이지 않는 손이 열매를 맺게 하고
조용히 지상(地上)을 지나간 것일까.
어둡고 지루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뭇잎들은 황엽(黃葉)이 지고
사람들은 가을 도배를 하고 새옷을 꺼내 입는다
허망히 떠나가는 한 해를 다시 보내며
괴로운 세월(世月)에 부대끼는 사람들
그들의 지붕 위에
다사로운 가을 햇빛이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들어앉아
처마끝을 지나가는 바람 소릴 듣는다
가을은 찬바람을 몰고 와
지상(地上)에 모든 것을 조락시키며
무한한 곳으로 떠나나 보다.
추일서정(秋日抒情) 2.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http://img.search.daum-img.net/profilethumb/newthumb/pp_thumbnail/profilethumb/FNB.jpg)
1914. 1. 19 ∼1993. 11. 23
경기 개성 출생.
심상파(心象派) 계열의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고 이론화된 모더니즘 시론을 주조로 하여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착에 이바지했다.
송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산과 용산 등에서 공장 사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병〉(동아일보, 1929. 10. 19)·〈야경차〉
(동아일보, 1930. 1. 12)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 쓴 시 27편을 모아 제1시집 〈와사등 瓦斯燈〉(1939)을 펴냈다.
8·15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관계하면서 이념 대립을 지양하는
'제3문학론'을 내세움. 8·15해방 이전까지 쓴 시 19편을 모아
제2시집 〈기항지 寄港地〉(1947)를 펴냈다.
6·25전쟁 이후 제3시집 〈황혼가〉(1957)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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