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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카프카

헤븐드림 2024. 7. 27. 06:04

책소개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의 작품을 두고 '검은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이라 표현했다. <변신>은 쿤데라의 이러한 표현에 더없이 적합하다. 카프카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인의 삶,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삶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불안한 의식과 구원에의 꿈을,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로, 기이하고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발표된 지 90년, 1950년 이래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도 반백년이 넘은 <변신>의 번역본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이번에 출간된 <변신>은 삽화가 특히 돋보인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아티스트 루이스 스카파티의 삽화는 <변신>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더없이 '카프카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다른 색을 전혀 쓰지 않고 검은색으로만 처리한 이 삽화들은, <변신> 뿐 아니라,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속에서

첫문장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등에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위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질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1883년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4](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그가 집필한 단편소설 <선고>에선 현실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아버지가 그려져 있는데 그가 원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고 폭언을 일삼으면서 키웠는데 이는 프란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될 정도다. 헤르만이 이런 식으로 아들을 기른 것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한 자신과는 프란츠가 매우 달랐던 데다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크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프라하의 약 10%의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 배경이 여기에 있다

 

프라하에 보존된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 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했다.

말이 적었지만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직장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실제로 노동자 실태 파악을 위해 출장을 다니고 노동 조건 개선 등에 힘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여행을 떠난 인형이 쓴 편지라며 자신이 쓴 편지를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5] 이는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생전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전업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은 돈벌이나 인기몰이 대신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써야 한단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별도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겹게 작가의 꿈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글만 쓰며 사는 삶을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7월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뒤 친구와 함께 덴마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부모에게 편지를 썼는데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향을 묻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카프카가 조사하여 보험공단에 제출한 산업재해 보고서. 목재 가공 중 벌어지는 손가락 절단 사고 양상에 대한 보고서이다.

노동 보험 공단은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두 번 잠을 잤다는 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징병 대상자였고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 영장을 발부했으나 그의 직장이었던 보험공단에서 그가 공단의 필수 인력이라고 보호해주어 전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그는 귀향한 전쟁 부상자들 및 러시아 제국령에서 들어온 아슈케나짐 유대인 난민들을 상대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이때 동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만난 경험은 그의 유대인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속하고 또 만났던 프라하 유대인들은 사실상 거의 독일화된 유대 전통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수준이었으나 동방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모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다른 여자들과 여러 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하지는 못했다.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부유한 남성과 결혼했으며 카프카가 그녀와 쓴 편지를 모두 태워 버린 데 반해 그녀는 평생 카프카의 편지를 간직했다. 살아생전 바우어는 그 편지들을 출간하라는 제의도 받았으나 거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매컬리 컬킨과 친분이 있는 미국 뮤지션 애덤 그린이 바우어의 증손자다. 이와 관련해 2013년 독일에서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무명작가였다고 많이 알려져 있고 실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 <실종자(아메리카)>, <소송(심판)> 같은 대표장편들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고 단편들만 발표했음에도 1915년 폰타네상을 수상하고 20세기 독일 모더니즘 대표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그를 만나고 싶어 직접 프라하를 찾아왔고 독일 여행중에 <유형지에서> 낭독회를 갖는 등 독문학계에선 주목받은 작가였다. 역시 생전에 무명이었다는 오해를 받는 에드거 앨런 포, 허먼 멜빌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생판 무명이었던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그는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사는 바람에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아버지란 지위의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그가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원망이 가득하다. 소설 대부분의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론도 있으며 <소송>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의 여동생들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는데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7]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8] 현재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집필한 <시골의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기 판본들은 원문을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했다. 브로트의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이다.

그는 <>, <소송>[9], <실종자>[10]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은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는 결말이 없다. 특이하게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를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음악사의 K는 모차르트, 문학사의 K는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는 훗날 작가들의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