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네(Claude Monet, 프랑스, 1840~1926), 차일로 가는 길(The Road To Chailly), 1865, Pirvate Collection ⓒ 2008 Monet
위 두 모네의 그림과 아래 고흐의 그림들과 같은 풍경화는 자연계에 속해 있는 인간의 위치와 그에 대한 인간의 상황,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결코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는 없습니다. 15세기에는 종교화의 배경에 풍경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말까지는 대부분의 작품을 작업실에서 완성하였습니다. 풍경화가들은 공간과 스쳐가는 빛, 그리고 무한한 대기의 효과를 묘사하기 위해 관례적인 표현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풍경화의 의미와 표현법, 그 세상의 재구성
쿠르츠(Don Kurtz)가 제공한 모네의 초상 그러나 이러한 표현법으로, 전경의 주요 사물들을 강하게 묘사하고 화폭의 외곽을 건물이나 나무로 둘러싼 그림으로 깊이있는 공간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래 고흐의 그림처럼 시골의 오솔길이나 위 모네의 그림과 같이 강물처럼 굽이치는 형상을 이용해 공간적인 후퇴감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경과 후경을 연결시켰으며, 폭넓은 풍경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특히 위 "카퓌신 대로"처럼 작가가 높은 시점을 취함으로써, 독자나 관람자도 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로 지평선까지 펼쳐진 드넓은 대지를 굽어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1890년대 모네의 그림은 "노적가리"나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등 연작을 그리면서 다양한 시간과 계절, 빛과 대기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 두 그림은 그 이전인, 6-70년대에 그린 작품들입니다.
위에 확인하는 것처럼, 1890년대에 실외에서 쫒던, 변화하는 풍경과 그러한 변화가 일으키는 감각적인 인식의 포착이나 인상주의적인 색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담백하면서도 통일된 색채로 자연의 실상과 느낌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훨씬 편안한 느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림인 "카퓌신 대로"는 특히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본 우아한 길에 무리지어 다니는 시민들로 가득 차 있는 거리와 도시 생활을 담은 풍경화입니다. 무척 부드럽고 통일된 색조를 보여주며, 군중의 움직임조차도 획일된 얼룩 색점으로 통일시킴으로써 무척 인상적인 감각을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 모네(Claude Monet, 프랑스, 1840~1926), 카퓌신 큰 가로수길(대로, Boulevard Des Capucines), 1873, Pirvate Collection ⓒ 2008 Monet
▲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포플러나무가 있는 좁은 시골길(Lane with Poplars), 1885, Oil on canvas, Museum Boymans-van Beuningen, Rotterdam, Netherlands
▲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가을 풍경화(Autumn Landscape), 1885, Oil on canvas laid down on panel, Fitzwilliam Museum, Cambridge, UK
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하지만, 네덜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특히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포르트 준데르트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엄격했던 개신교 목사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 1822~85)와 외향적인 성격의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Anna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빈센트는 당시 17살이던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고흐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으며,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Theo van Gogh)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몹시 행복해 하였으며, 그 헤이그 시절은 고흐의 삶에 있어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습니다.
자연스럽고 차분한 느낌의 가을 풍경화
쿠르츠(Don Kurtz)가 제공한 고흐의 초상
구혼의 거절과 직장에서의 해고로 좌절을 겪던 고흐와는 달리 동생 테오는 구필화랑의 유능한 화상이었으며, 전업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고흐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합니다. 동생으로 부터 받는 돈과 경제적인 지원은 데생기법의 책이나 물감, 땔감, 식량 등을 살 수 있는, 고흐 평생의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독학으로 수학하며,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지 못했던 고흐의 그림은 데생이나 색체 구연에 있어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과 함께 수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결혼 생활의 좌절과 며칠씩 굶는 계속되는 빈곤으로 1880년대에 부모의 집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이 때, 누에넨에 있던 목사관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머무는 2년 동안 2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열정적으로 그려 냅니다. 위 두 그림 역시 이 당시에 그렸던 작품들입니다. 무척 평온한 느낌이며, 색체의 구성도 다소 어두운 편으로 차분한 가을 느낌을 돋보이는 풍경화입니다.
파리에서 고갱(Paul Gauguin, 프랑스, 1848-1903), 모네, 로트렉(Taulouse Lautec, 프랑스, 1864-1901),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 프랑스, 1834-1917) 등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기 이전의 귀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므로 붓질의 화풍이나 색채의 사용이 무척 자연스러우며, 그의 강렬한 화법과 색채의 화려한 특징들을 엿볼 수 없는, 그의 정열적인 화풍이 완성되기 이전의 담백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잔잔한 감동이 일품입니다.
▲ 바위에 난 떡갈나무(The Oak in the Rocks), oil on panel, 1860,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 숲 안쪽에서 바라본 풍경(Forest Interior), oil on panel, 1857,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 퐁텐블로 숲 어귀(Edge of the Forest of Fontainebleau, Oil on paper, 1848-50,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 퐁텐블로 숲(Forest at Fontainebleau), Oil on cradled panel,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 휴식처(Coucher De Soleil), Oil on panel,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 퐁텐블로 숲 어귀(Edge of the Forest of Fontainebleau, Oil on paper, 1848-50,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2008 Rousseau
파리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던 루소
루소에 대한 약력을 간략하게나마, 먼저 소개합니다. 루소는 1812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4세 때부터 친척인 포 드 생마르탱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혼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베끼는 방법으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1820년대에 들어선 당시부터는 자연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기발한 발상이었으며,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화풍은 살롱전(the Salon)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루소는 신고전주의 전통에 속해 있었던 스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Richard Parkes Bonington, 영국, 1802-1828)이나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영국, 1776-1837)과 같은 영국 화가들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연구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계발하기도 하였습니다.
▲ 쿠르츠(Don Kurtz)가 제공한 루소의 초상
1933년 퐁텐블로에 방문한 루소는 바르비종의 계곡에 정착하여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 곳에서 작업하고 있던 자연주의 화가들, 장 프랑스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 1814-1875)와 쥘 뒤프레(Jules Dupré, 프랑스, 1811-1899),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프랑스, 1796-1875), 찰레 프랑스와 도비니(Charles-François Daubigny, 프랑스, 1817-1878) 등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함께 하였습니다.
1848년의 영국혁명 이후, 살롱에서도 프랑스 풍경화에 있어서 루소를 중요한 화가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855년에 있었던 세계 박람회(the Universal Exposition)에 출품되었던 그의 작품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1867년에는 그 박람회에 미술 심사원 의장으로 초청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해 12월 12일, 루소는 마침내 그가 살던 바르비종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과 작품들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충분히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화가라 하겠습니다.
바르비종의 동양적인 여유로움과 평화를 사랑했던 루소 이 가운데 코로의 풍경화는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조속에 평화로운, 마치 추억의 베일에 싸인 듯 시정높은 자연의 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편 밀레는 코로에 비해 한층 더 사실주의적인 화가로 농민생활을 전원풍경과 함께 조화롭게 담아냈습니다. 밀레의 그림은 어떤 가식도 없거니와, 깊은 인간적인 공감과 종교적인 경건함이 베어 있습니다. 이 기회에 앞에서 소개했던 두 화가들의 그림들도 함께 비교해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루소의 그림과 초기 풍경화는 자연을 거칠고 불규칙하며 난폭한 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작품은 프랑스의 유명한 낭만파(Romanticism) 화가와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이상적인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풍경화라는 평가도 받았으며, 잘 짜여진 직물같은 구도와 섬세한 붓질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전조가 되기도 합니다.
위 코로나 밀레의 그림에 비하면 루소의 작품은 퐁텐블로 숲 어귀의 풍경을 계절에 따른 빛의 변화와 그 변화의 오묘한 색채를 섬세하면서도 정감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우주 속 어머니의 대지 안에 들어와 있는 듯, 태아로 되돌아가 어머니의 양수에 들어와 있는 듯, 동양적인 여유로움과 평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테오도레 루소 그림의 특징을 들자면, 위에서도 볼 수 있는 숲 풍경, 특히 퐁텐블로 숲 풍경이나 농촌의 아름다운 정경을 주 소재로 담아내고 있으며, 코로와 마찬가지로 그의 화폭 안에서는 자연이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자연의 살아 생동하는 느낌을 부드러운 빛과 평온한 색채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아래 그림에서도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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