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아르놀트 쇤베르크(오스트리아 1874년 9월 13일-1951년 7월 13일 (향년 76세)

헤븐드림 2022. 2. 1. 02:45

 

 

쇤베르크는 1874년 음악의 도시인 오스트리아의 에서 자무엘 쇤베르크(1838~1889)와 파울리네 나크호트(1849~1921)내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규 음악교육은 많이 받지 못해 8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16살 때부터 아마추어 실내악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면서 지휘자 쳄린스키에게 3개월간 대위법을 배운 것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편곡등의 일을 하면서 직접 작곡을 시작하는데, 주로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후기 낭만주의의 색깔이 짙은 곡들을 작곡하게 된다. 특히 말러의 경우에는 거의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때 현악 6중주 '정화된 밤',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등을 작곡한다.[2] 그러나 빈에서는 보수파들의 공격을 받아 '정화된 밤'이 연주를 거부를 당하는 등의 일을 당하게 된다. 이 때 안톤 베베른알반 베르크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며 2차 빈 악파[3]를 구성하게 된다.

후기낭만주의적 작풍으로서의 그의 작품 중 정점은 1910년에 완성된 '구레의 노래'였다. 이 곡은 5명의 독창자, 8부 혼성 합창, 3부 남성 합창, 해설자, 1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한 말러의 8번 교향곡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중의 어마어마한 호응을 이끌어내며 찬사를 받았지만, 쇤베르크가 '대중의 입맛에 맞춰' 작곡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계속하여 수많은 혹평과 비난을 받아가면서 현악 사중주 1,2번, 실내 교향곡 1번 등을 통해 조성을 점차로 허물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성을 포기하고 노골적인 무조음악으로 기울어갔다. 이 때에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연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등을 썼고, 본격적으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표현주의 음악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한동안 작곡을 중단하게 된다.

전후 다시 작곡을 하면서, 그는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12음 기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기법에 대해 '향후 100년간 독일 음악을 최고봉에 올릴 발견'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기법을 사용해 그는 피아노 모음곡, 관현악 변주곡, 현악 4중주 3번등을 작곡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작품도 인정을 받게 되어,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에 임용되지만, 얼마 안가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중 나치의 명령으로 학교에서 해임되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는 유럽에 오지 않았다.[4]

1936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UCLA의 교수로 부임하고, 한동안 중단했던 작곡활동을 현을 위한 모음곡으로 재개하게 된다. 한편, 그는 '야곱의 사다리',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완성하기 위해 구겐하임 재단에 기금을 신청했으나, 탈락하게 된다. 아마 기금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이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영화 대지 음악을 의뢰받아 맡으려다가 그만둔 바 있다.[5]

한편, 나치의 만행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도 음악을 통해 나치와 히틀러를 비판하게 된다.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바르샤바의 생존자, 나폴레옹에 대한 송가 등을 발표하여, 사회 참여적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음악의 정치성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그로서는 굉장히 전향적인 행보.

그리고 1951년 7월, 그는 종교음악 '시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영면하였다. 유언은 "하모니(Harmony)..."

 

그의 작품들과 12음 기법은 생전에 많은 반대자들을 낳았으며, 대중적 인기로 따지면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의 시기가 '쇤베르크를 따르는 자 vs 쇤베르크에 반대하는 자'의 시기였다고 설명되기는 하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신고전주의를 따르는 작곡가들이 훨씬 수적으로 압도적인 것이 실상이었으며 '쇤베르크 파'인 작곡가들은 특이한 소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 들어, 전후의 젊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에 기초한 음렬주의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바탕한 곡을 쓰면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12음 기법을 음정뿐만 아니라, 길이, 강약, 음색에까지 사용하는 총렬주의로 나아가면서 이 방식은 음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서 한동안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고, 쇤베르크는 선구자적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다.

 

관현악곡

  •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작품번호 5(1902~3)
  • 실내 교향곡 1번 마장조 작품번호 9(1906)
  • 5개의 관현악 소품 작품번호 16(1909)
  • 관현악 변주곡 작품번호 31(1925~6)
  • 실내 교향곡 2번 내림 마단조 작품번호 38(1906, 39)
  • 주제와 변주곡 사단조 작품번호 43b (1943)

협주곡[편집]

  •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번호 36(1934,6)
  • 피아노 협주곡 작품번호 42(1942)

실내악

  • 현악 4중주 라장조(1897)
  • 현악 6중주 정화된 밤 작품번호 4 (1899)
  • 현악 4중주 1번 라단조 작품번호 7(1904/5)
  • 현악 4중주 2번 올림 바단조 작품번호 10(1907/8)
  • 목관 5중주 작품번호 26(1924)
  • 현악 4중주 3번 작품번호 30(1927)
  • 현악 4중주 4번 작품번호 37(1936)
  • 현악 3중주 작품번호 45(1946)
  • 환상곡 작품번호 47(바이올린과 피아노, 1949)

피아노

  • 3개의 소품 작품번호 11 (1909)
  • 6개의 작은 소품 작품번호 19(1911)
  • 모음곡 작품번호 25(1921)
  • 2개의 소품 작품번호 33(1928,31)

가곡

  • 6개의 관현악 가곡 작품번호 8(1903~5)
  • 가공의 정원에서의 15개의 시 작품번호 15(1908~9)
  • 마음의 나뭇잎 작품번호 20(1911)
  • 달에 홀린 피에로 작품번호 21(1912)

합창

오페라

  • 기대(독백극) 작품번호 17(1909)
  • 행복한 손(음악이 있는 드라마) 작품번호 18(1910~13)
  • 오늘부터 내일까지 작품번호 32 (1928~9)
  • 모세와 아론 (1930~32, 미완성)

일화

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쇤베르크 자신이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는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기 두 달 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