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소식

윤동주 시(詩)가 품은 신학이야기/백충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헤븐드림 2021. 12. 18. 06:24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시인이다. 2015년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 27년 2개월의 나이로 서거한 때로부터 70주년이었고, 2017년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이를 계기로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이 확산되고 있다. 2016년의 영화 ‘동주’와 2017년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는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윤동주의 ‘서시’를 비롯하여 몇 편 정도만 알고 있지만 그의 시(詩)의 세계는 어머어마하다. 그에 대한 관심은 한국 외에도 일본과 중국에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의 시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터키어 등등으로 널리 번역되어 있다. 또한 윤동주와 관련하여 나왔던 연구는 석사 및 박사 학위논문을 포함하여 600편 이상이다. 윤동주의 시(詩)를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의 신학세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윤동주의 시(詩)를 하나의 신학이라고, 그리고 윤동주를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신앙인으로서 신(神)을, 즉 하나님을 얘기하고 노래한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윤동주와 기독교와의 관계는 아주 긴밀하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북간도(北間島/北墾島) 명동촌(明東村) 전체가 기독교 이상촌이었다. 명동촌 중심에 명동학교와 명동교회가 있었고, 마을의 이름들이 구세동, 영생동, 천당골 등과 같이 기독교 용어를 포함하였다.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장로였고,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도 교인이었다. 윤동주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윤동주의 외삼촌, 즉 윤동주의 어머니 김용의 오빠인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은 명동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북간도 조선인 사회의 중심인 간민회(墾民會)의 창건자이며 지도자였다. 특히 1918년 11월 만주 지역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2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 수학한 후에 목사안수를 받고 명동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리고 서울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근대학문을 익혔던 정재면(鄭載冕, 1884-1962)은 신민회(新民會)의 북간도교육단으로 파송을 받아 1909년부터 명동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명동촌 전체가 기독교로 변화되었다. 이후 정재면은 1925년부터 2년간 중국의 남경 금릉(金陵)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간 더 공부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8년부터는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활동하였다. 윤동주와 함께 자랐던 문익환(文益煥, 1918-1994)의 아버지 문재린(文在麟, 1896-1985)은 1922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주기철(朱基徹, 1897-1944)과 함께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이후 캐나다 임마누엘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여 1946년까지 용정중앙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윤동주가 태어나서 자란 가정과 마을 자체가 기독교 영향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학교들도 거의 모두 기독교의 영향이 많은 곳이었다. 명동촌에 김약연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당 ‘규암재’를 만들었고, 이것이 1908년에 명동학교로 확대되어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윤동주는 이 명동학교(명동소학교)에 1925년 4월 4일에 입학하고 1931년 3월 20일에 졸업하였다. 명동중학교는 1925년에 폐교되어 1931년에는 화룡현 현청 소재지인 대랍자(大拉子)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입학하여 1년을 다녔다. 그리고 윤동주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1932년 4월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나중에 대성중학교와 합쳐지고 이후 용정중학교가 되었는데, 본래 캐나다장로교선교부가 세운 학교였다. 그리고 평양의 숭실중학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다. 1935년 9월에 3학년 2학기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명령거부로 인하여 1936년 1월 학교는 무기휴교 당하고 학생들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자퇴하였다. 윤동주와 문익환도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왔다. 다만,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에는 1936년 4월 4학년에 편입하고 1938년 2월 17일 졸업하였는데, 이 학교는 일제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학교였다. 이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1938년 4월 9일에 입학하고 1942년에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다. 이 기간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이 다니는 협성교회에 다녔고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성경반에도 참석하였다. 이후 윤동주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교에 1942년 4월 2일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성공회에서 세운 학교였는데 한 학기만 다녔고, 1942년 가을에는 바로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교로 옮겨 갔다. 1942년 10월에 입학한 도시샤대학교도 기독교에서 세운 사립학교이었다.

 

이와 같이 윤동주가 일제 식민지 하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곳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 영향으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영향이 그의 시(詩)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하나의 신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17년 12월 30일이 윤동주가 태어난 날인데, 그가 17세이던 1934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에 쓴 시가 세 편이 있다.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이 있다. 이 시들은 윤동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처음 것으로 알려진 시들로서, 작품 안에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쓰여 있다. 그 중 ‘초 한 대’는 성탄절 이브에 쓰여졌는데, 예수님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년 12월 24일)

 

 

이 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불살라 버리”시는 분이시며, 그럼으로써 암흑을 내쫓고 세상을 밝게 비추며 위대한 향내를 풍기시는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서 윤동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리”시는 분으로 포착하여 노래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을 윤동주는 이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슬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1934년 당시 일제 식민지 치하의 슬픈 현실이기에 그러하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세계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詩)에서는 현실세계에서의 슬픔이 그저 슬픔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윤동주는 이 땅에서의 슬픔을 영원한 슬픔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슬픔에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가 연희전문학교 1학년이던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八福) – 마태복음 5장 3-12’라는 시(詩)에서 드러난다. 이 시(詩)는 윤동주가 1939년 9월 이후로 절필하다가 거의 1년 3개월 만에 쓴 시(詩)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 중 마태복음 5장 3-12절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노래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1940년 12월)

 

 

이 시(詩)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연은 8행이고 2연은 1행이다. 1연에서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8번 반복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2연인데,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는 과연 무슨 의미인지를 상상하며 윤동주의 신학세계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이것이다. 현대신학에서 가장 유명한 분 중의 하나인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 1972년도에 출판되었는데, 그리고 일본의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 1946년도에 나왔는데, 하나님의 슬픔을 노래하는 윤동주의 시(詩)는 1934년과 1940년에 쓰여졌으니 이들보다 훨씬 먼저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얘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의 시(詩)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많이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영어로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와 터키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러기에 윤동주의 시(詩)의 신학세계와 신학이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윤동주의 시(詩)는 일본과 중국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기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한국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지만, 북한에서도 좋아한다고 한다. 일본의 도시샤 대학교에 가니까 윤동주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일본 내의 재일교포와 조총련계가 함께 세웠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詩)의 신학세계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시인 신학자 윤동주라고 표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