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 안도현
‘추억’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다.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언어로서 숨이 끊겨버려 내다 버릴 곳도 없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이나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키치’라고 하는데 ‘추억’이야말로 키치 문화의 대표적인 언어다. 시골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생활에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곧잘 이 말을 듣게 된다. “좋은 추억 만들어 가고 싶어요.” 나는 이따위의 예쁜 척하는 말로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추억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가. 여행지가 추억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도 되나?
추억이란 아련하고 어렴풋해서 불투명 유리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뚜껑을 자세히 열어보면 온갖 구질구질한 시간의 잔해, 치욕과 모욕의 언사, 가난과 결핍의 부유물들이 떠돌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감추거나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억은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위장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과거를 낭만적인 빛깔로 채색해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너나없이 힘겹게 세월을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추억이라는 말로 ‘사실’은 가릴 수 있지만 ‘진실’마저 가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추억이란, 심장에 금이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쪽에만 아프게 새겨지는 것이다. 아파야 추억인 것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추억 돋는다’는 말을 마구 쓴다. 지네들이 얼마나 아파봤다고!
집필실 / 안도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때 작가들은 집필실을 찾는다. 이름을 알 만한 작가 중에는 오피스텔을 개인 집필실로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자치단체나 문인단체에서 지원하는 공간으로는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과 원주의 토지문학관, 서울의 연희문학창작촌이 대표적이다. 제주의 마라도 창작스튜디오는 유배 가듯 짐을 싸서 들어가는 곳. 최근에는 과학도를 기르는 카이스트에서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을 쓰기 위해 절을 찾는 작가들이 있었다. 세속의 번잡함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자신의 내부를 간섭받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절이다. 그동안 절에서 잉태해 한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산사라는 공간이 작가에게 집필 장소만을 제공했을까? 절을 감싸고 있는 산과 그 고요의 능선들이 없다면 작가들은 굳이 그곳을 작업 공간으로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집필실은 글쓰기라는 노동 이외에 사색과 휴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곳이 제격인 듯싶다.
전주 근교의 농가를 구입해 출퇴근하듯이 드나든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펜을 놓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열어두곤 했다. 방 안에서 빗소리만 듣고도 무슨 비가 내리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마당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나면 지붕 위로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톡톡 처마 끝에 비가 떨어지면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