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윤오영

헤븐드림 2023. 3. 5. 11:12

 

봄 윤오영  

 

 

 

창에 드는 볕이 어느덧 봄이다봄은 맑고 고요한 것비원의 가을을 걸으며 낙엽을 쥐어본 것이 작년이란 말인가나는 툇마루에서 봄볕을 쪼이며 비원의 가을을 연상한다가을이 가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가을 위에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온 것이다그러기에 지나간 가을은 해가 멀어갈수록 아득하게 호수처럼 깊어 있고오는 봄은 해가 거듭될수록 쌓이고 쌓여 더욱 부풀어가지 않는가.

나무는 해를 거듭하면 연륜이 하나씩 늘어간다그 연륜을 보면 지나간 봄과 가을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둘레에 남아 금을 긋고 있다가을과 봄은 가도 그들이 찍어 놓고 간 자취는 가시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사람도 흰 터럭이 하나하나 늘어감에 따라 지나간 봄과 가을이 터럭에 쌓이고 쌓여 느낌이 커 간다.

꽃을 보고 반기는 소녀의 봄은 꽃뿐이지만꽃을 캐는 소녀를 아울러 봄으로 느끼는 봄은 꽃과 소녀들이다사랑을 노래하는 청춘의 봄은 화려하고 찬란한 봄이지만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봄은 인생의 끝없는 봄이다누가 봄을 젊은이의 것이요늙은이의 것이 아니라 하던가젊은이의 봄은 기쁨으로 차 있는 홑겹의 봄이지만 늙은이의 봄은 기쁨과 슬픔을 아울러 지닌 겹겹의 봄이다과거란 귀중한 재산과거라는 재산이 호수에 가득 찬 물결같이 고이고 고여서 오늘을 이루고 있는 것그러므로 물이 많을수록 호수가 아름답고 과거가 길수록 오늘이 큰 것이다.

늙어서 봄을 맞으며 봄을 앞으로 많이 못 볼까 슬퍼할 필요는 없다그동안 많이 가져본 봄이 또 하나 느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할 일이다산에 오르거나 먼 길을 걸을 때십 리고 이십 리고 가서 뒤를 돌아다보고는 내가 저기를 걸어왔구나 하며흐뭇하고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그리고 돌아다보는 경치가 걸어올 때보다 놀랍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다만 지나온 추억을 더듬어 한 개의 진주를 발견하지 못하고 거친 모래알만 쥐어질 때그것이 슬프다보잘 것 없는 내 과거가 항상 오늘을 슬프게 할 뿐이다.

뜰 앞에 한 그루 밀감나무가 서 있다동쪽 가지 끝에 파릇파릇 싹이 움돋기 시작한다굵은 가지에서도 푸른 생기가 넘쳐흐른다미구에 잎이 퍼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이다집안사람들의 기대가 사뭇 크다그러나 서쪽 가지에서는 소식이 없다나무의 절반은 죽은 가지다죽은 가지에 봄은 올 리 없다지난겨울에 잎이 다 떨어지고 검은 등걸만 남았을 때혹 죽지나 아니했나 염려도 했고봄이 되면 살아나겠지 믿기도 했었다그러나 같은 나무 한 등걸에서 한 가지는 살고 한 가지는 죽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눈보라 추위 속에서도 한 가지는 생명을 기르며 겨울을 살아왔고한 가지는 그 속에서 자기를 살리지 못했던 것이다저 동쪽 가지의 씩씩하고 발랄한 생의 의지지난겨울 석 달 동안마음속으로의 안타까운 저항그리고 남모르는 분투와 인내이에 대한 무한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싶다봄이 가면 봄이 없다고 슬퍼함은 일 년을 사는 곤충의 슬픔이다교목은 봄이 열 번 가면 열 개의 봄을가을이 백 번 가면 백 개의 가을을 지닌다.

생활에 따라서는 인류 역사 억만 년의 봄이 다 내 몸에 간직된 봄이요생각에 따라서는 잊지 못할 봄이란 또 몇 날이 못 될 것이다그러므로 오래 세상에 머물러 봄을 여러 번 보는 것이 귀한 게 아니라봄을 봄답게 느끼고 지나온 모든 봄을 회상하며 과거를 잃지 않고 되새기는 것도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해 줄지언정 섭섭할 것은 없다.

다만 봄은 나를 잊지 않고 몇 번이라도 찾아 와 세월을 깨우쳐 주었건만둔감과 태만이 그를 저버린 채 헛되게 늙은 것이 아쉽고 한스러워 다시 찾아 주는 봄에 죄의식조차 느낀다그러나 이제 발버둥 처 봐도 미칠 수 없는 일고요히 뜰 앞을 거닐며 지나간 봄의 가지가지 추억과 회상에 남겨보는 것이다오늘 따라 주위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따스한 햇볕이 백금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