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처럼 슬픈 가을이 온다. 바람으로 먼저 오는 가을. 그리하여 우리의 살갖을 스치며 영혼을 춥게 하고 마침내 우리를 허무라는 지향 없는 방황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가을은 하늘에서 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을 맑게 하고, 영혼을 슬프게 울리고, 고독이라는 끝 모를 시간 앞에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달이 밝은 가을밤 창가에 서면 목까지 차 오르는 그리움,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세, 그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어느 사람이 있어 이 가을의 막연한 그리움과 적막함과 서글픔의 정서를 분석하고 자세히 해명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무의미한 일일까. 무엇 때문이라고 그 명료함이 설명된다고 하여도 가을이 주는 적막한 우울과 그리움의 사색이 치유될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가을은 태고로부터 그런 계절이며, 자연으로부터 태어남을 받은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그 정서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랴.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가을의 긴 밤을 통해서 인생을 생각하는 깊이를 더했고 학문을 연마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삶인 것이다.
가을의 슬프고 애달픈 정서는 감상으로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 많은 일깨움을 주기도 한다. 더러는 머무는 것보다 떠날때 맞추어 떠나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교훈을 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는 지혜를 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소녀는 소녀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의 빛깔은 같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팔십 인생을 산 노인이 플라타너스 넓은 잎이 떨어져 내리는 걸 보며 느끼는 삶의 허무와 고적이, 소녀가 느끼는 뜻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과 그 농도나 깊이가 다를 뿐 감정의 흐름은 동일한 것이리라.
달 밝은 가을밤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 그 가을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영혼은 곱고 착한 영혼이다. 가을 달을 지키며 가슴 저려 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가슴 적시는 영혼은 지순하고 순결한 영혼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며, 가식이 아니며, 철없음이 아니며 위선은 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혼자 느끼고 표현되는 것이어서다.
가을밤을 쉽게 잠드는 사람의 영혼은 메마른 영혼이다. 가을 달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영혼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영혼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삶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가엾은 영혼이다.
가을밤엔 일찍 잠들지 말자.
잠 오지 않는 그 밤의 시간에 스스로의 삶을 깊이 생각하자. 그 허망함에 대하여, 그 쓸쓸함에 대하여, 그 적막함에 대하여, 그리하면 나의 욕심에 대하여, 나의 탐욕에 대하여, 나의 이기에 대하여 부질없음의 반성과 염치없음의 부끄러움이 생기게 되리라. 그러한 시간을 내일에 모두 잊는다 해도, 다시 그 다음날에 또 갖게 됨으로 우리의 영혼은 그나마 정결과 순결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아니랴.
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자세를 갖게 하는 계절이다. 범속하고 약한 것이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일깨워주기도 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모두 용서해주라는 맑음을 선사하기도 하는 계절이다.
가을밤, 창문을 열어 놓고 잠언록이라도 펼칠 일이다. 그리고 한 구절씩을 되새김하여 읽어볼 일인 것이다. 그리하면 거기에 일상의 소란 속에서 망각했거나 잊혀진 우리네 삶의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가을을 깊이 앓는 일은 순결한 일이며 고결한 일이다. 그 밀도만큼 자신의 삶이 정화되고 맑아진다는 것을 체득하는 길이다.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다. 그 혜택을 베풀면서 인간들이 지나치게 탐욕하거나 자만할지 몰라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한 허무감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함께 보내준 것이리라.
마음은 또 지향 없는 길을 떠나 먼 하늘가를 헤매이리라. 일상의 생활이 아무리 건조하고 복잡하고 권태로워도 잠시라도 거기에서 벗어나 가득가득 담겨오는 가을 하늘의 싱싱한 호흡을 마음껏 내 것으로 하자.
그리하면 이 인생의 어렵고 어리석은 일들은 저절로 사라지리라.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윤오영 (0) | 2023.03.05 |
---|---|
시가 당신을 살립니다/나태주 (0) | 2023.01.05 |
내 이름을 불러본다/고재건 (0) | 2022.10.02 |
배웅/박경주 (0) | 2022.09.29 |
신기독愼己獨 / 권오훈[제22회 수필과비평 문학상 대표작] (0) | 2022.09.15 |